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다가갑니다. 소녀는 내심 반가웠지만, 포근함이 느껴질 때쯤 다시 겁을 먹고 도망을 칩니다. 그는 정확한 이유를 모를 테죠. 아무리 뒤를 쫓아와도 듣지 못할 겁니다.
이제는 일말의 죄책감도 없으며 자신을 탓하기 바쁩니다. 그렇게 멀리 도망친 뒤 똑같은 하루를 삽니다. 무력한 시간은 그렇게 지나갑니다. 진심을 담은 누군가가 나를 안아주려 해도 두 팔을 벌리지 못합니다.
"거짓말은 그만해주세요. 전 사랑할 수 없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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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참 외로웠습니다. 고독에 지쳤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누군갈 사랑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만약, 다시 사랑을 한다면 그게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 여기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더 신중했고 냉정했으며 홀로 도망쳤던 걸지도 모릅니다. 근데 왜 다시 그이가 나타나는지. 모른 척하려 했지만 저 멀리서 자신에게 달려오는 그를 무시하긴 힘들었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소녀에 말합니다.
"다신 느끼지 못할 느낌이 들어서요."
소녀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의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나에게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습니다. 그때 마음이 조금 열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더니 꾹꾹 눌러뒀던 감정이 마구 쏟아져 내렸습니다. 새벽이었습니다. 달이 예뻤고, 그들은 낡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있었습니다. 그는 차분하게 소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소녀를 바라보는 눈에는 눈부신 은하가 들어가 있는 듯했습니다.
벅찬 마음에 행복하게 해 줄 자신보단, 매순간순간 위할 거라는 말을 했지만 그녀가 다시 도망갈까 봐 한껏 겁을 먹기도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소녀는 '이 사람이라면 어쩌면'이라는 생각을 잠시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서로를 알아가기로 언약했습니다. 기묘한 애틋함이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소녀는 늘 마음을 경계하고 한 발짝 물러서 이 관계를 바라봅니다. 그이라면 잔잔하고 고요한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찢어지는 아픔을 다시 느끼는 것만큼 고통은 없으니까요.
사랑은 한 치 앞도 모른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는지.
눈을 감고 새벽바람을 만끽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그리고 소녀는 간절히 생각합니다.
'이렇게 당신을 계속 바라볼 수 있기를.
내가 먼저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8월의 이른 아침,
어느 한 사람의 마음에도 동이 텄습니다.
하나의 세계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 소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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