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자기가 좋은 사람인줄 착각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이야. 그동안 나는 공감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더라. 경청만 잘해도 공감이 된다는데, 판단하고 중간 중간 첨언하기 바빴어. 그게 도움이 될 것 같았거든. 그냥, 좋은 마음으로 한 거잖아? 내 말에 위로받았을지언정 설거지가 덜 된 그릇처럼 이물질이 남았을 거야.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듣기 싫었는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나는 제대로 공감하지 못하면서 목에 핏대를 올리고 있었어. 나 기분 좋아라고. 웃기지?
'에포케(epoche)'라는 단어가 있대.
고대 그리스인들이 사용했던 말인데 '판단 중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이런저런 판단은 멈추고,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라는 뜻이지. 진짜 공감을 하고 싶다면 에포케를 해야 해. 근데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의 고민을 들으면 10초 만에 답을 떠올려버려.
‘얘는 이런 애라서 이렇게 하면 해결될 거야. 그래서 말이지..’
결국, 그 답을 하려고 이야기를 듣는 척하는 거지. 목이 간질간질하면 중간에 이야기를 끊기도 해. 무례함의 극치야. 내가 그랬어. 내 말이 곧 정답인 것처럼 목구멍 안에 문장을 머금고 귀를 열었지. 내가 뭐라고. 내가 뭘 안다고.
잘 사는 것만 같았던 사람이 나에게 불행을 고백하는 건 아주 귀한 일이라고 생각해. 아픔을 곧이곧대로 말하기보단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많잖아. 앞으로는 고귀한 것을 유물처럼 삼고 훼손시키지 않으려고. “그랬구나.” “그다음은?” “지금은 어때?” 같은 말로 경청해줄 거야. 토 달지 않고 모든 걸 있는 그대로 이해해 줄 거야.
공감과 동감 사이. 연민과 동정의 잣대에서 나는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아. 경험해 보지 않은 일인데도 위로해 주려고 덤벼들었거든. 일종의 모르핀처럼 그 순간은 약효가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쉽게 증발하는 위로를 해주긴 싫어. 쓸데없는 첨언보다는 암묵하며 경청하는 게 100배는 나을 거야. 오만하지 말자. 글썽거리는 눈동자를 지긋이 바라보며 에포케를 하자. 들어주는 존재만 있어도 막혔던 숨통은 트이기 마련이니까.
넌 진짜 공감을 해주고 있어? 혹시 나처럼 단정 짓고 심지 없는 조언을 하진 않았어? 그렇다면 판단을 중지하고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귀를 열자. 좋은 리스너가 되면 내가 아끼는 사람에게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아, 그리고 진짜 다정한 사람은 굿 리스너이자 굿 텔러라고 했어. 어느 정도 경청을 했다면 네 이야기도 꼭 해봐. 동질감이 제일 큰 위로니 비슷한 일이 있다면 그걸 말해줘도 되겠다. 그런 대화는 남들이 모르는 애환이 느껴져서 은근 감동이 있어. 그렇게 유의미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다정함은 전염이 되어 돌처럼 굳어있는 사람의 귀와 입을 열게 할 거야. 또 다른 영웅이 탄생하는 거지. 나는 다정함이 다정을 잉태한다고 생각해. 이점을 항상 잊지 않으려고.
언젠가 누군가가 말했어. 친구가 물어준 질문 하나에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다고. 또 다른 사람은 그 사람과 대화할 때면 꼭 난로 앞에서 책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했어. 이야기를 나누는 건 녹초가 된 삶을 단숨에 되살리는 묘약임이 틀림없어. 나를 돌아보며 차갑게 식어있던 감정을 점검해 보자. 늘 해맑게 웃을 순 없지만, 언제든 죽은 마음을 살릴 수 있는 횃불을 가지고 있으면 좋지 않을까. 그 횃불은 지겹도록 말한 '다정함'이야. 에포케처럼.”